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고] ‘힘에 의한 평화’ 밑거름 한·미동맹

10월 1일은 6·25 한국전쟁 중 육군 제3사단이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한 날이다. 이를 기념하는 뜻에서 1956년에 이날을 ‘국군의 날’로 제정했고 올해 75주년을 맞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전방 부대를 찾아 “북한이 도발하면 1초도 기다리지 말고 응사하라”고 지시했다. 경기도 최전방 부대인 육군 제25사단 관측소에서 대북 경계 상황을 살핀 윤 대통령은 GOP 초소 근무 병사 등을 만나 격려했다. 그리고 윤 대통령은 “광복후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태동한 우리 군은 이제는 적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고, 국민에게는 신뢰받는세계 속의 강군으로 성장했다”고 강조했다.        또 10월 1일은 1953년 휴전 후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결단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날이기도 하다. 한·미동맹은 가장 성공적인 동맹의 하나로 상호 노력과 깊은 신뢰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동안 한·미 양국은 군사, 경제, 기술협력, 인적 교류 등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왔다. 앞으로도 미래를 위하여 자유, 민주주의, 인권 등 ‘행동하는 동맹’으로 발전해 갈 것이다.     올해 ‘국군의 날’을 맞아 서울 도심에서 군의 시가행진이 있었다. 윤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시가행진에 직접 참여해 장병·시민과 함께 행진했다. 감회가 새롭다. 대규모 군 병력과 장비가 동원된 시가행진은 2013년 이후 10년 만이다. 항공기의 공중분열에는 미 공군도 참여해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과시했다. 행사는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 군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국민과 함께하는 축제의 장으로도 평가를 받아 흐뭇했다.     6·25 전쟁의 포화를 뚫고 탄생한 한미동맹은 70년간 북한의 도발을 막고 대한민국이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 번영의 토대가 됐다. 대한민국은 이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고, 추격형 경제에서 선도형 경제로 탈바꿈했다. 아마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벌써 공산화되고 우리는 세계 최악의 빈곤·위험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북한·중국·러시아·일본에 둘러싸여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있는 한국이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은 것은 천운에 가깝다는 평가다.     사실상 한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도 한·미동맹이다. 휴전에 반대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1955년 대미 외교 성공으로 항공기, 전차, 함정 등 최신식 무기를 무상으로 지원받았다. 그리고  수백병의 군인을 미국 군사학교에 유학시켜 국군 현대화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1960년대까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군사원조는 당시 한국이 사용하는 국방비의 87%에 해당했다. 한국은 국방비에 쓸 돈으로 경제 개발에 매진했다. 덕분에 전쟁으로 폐허가 된 최빈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세계 6위의 군사 강국으로 성장했다.     지난 정부 당시 한·미연합훈련은 4년이나 중단됐다. 남북군사합의란 이름으로 적의 동태를 감시할 다수의 전방초소(GOP)도 철거해 군의 물리적 기능을 약화했다. 이제 한·미핵협의그룹(NCG)을 만들고 캠프 데이비드 합의를 통해 동맹이 제자리를 찾았다. 앞으로 동맹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굳건한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이한 올해, 장병들의 헌신으로 이룩한 자유대한민국의 평화는 강력한 힘에 의해 지켜질 것이다. 모름지기 ‘한미동맹’은 함께 가는 길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밑거름 미동맹 이승만 대통령 아이젠하워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

2023-10-11

한미동맹 70년, 이승만 혜안이 옳았다

한미동맹 70년, 이승만 혜안이 옳았다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우남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다. 하지만, 학생 시민들의 봉기로 권좌에서 쫓겨난 ‘독재자’이기도 하다. 그는 한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지만, 한편에서는 “친일파들을 중용해 민족정기를 흐렸다.”고 그를 비난한다. 그는 애국자였지만, 좌파로부터는 “미국에 붙어 단정(單政)  수립에 앞장선 분단의 원흉”으로 지탄받고 있다. 하지만 이승만 박사가 아니었다면 대한민국도 공산화되어 북한처럼 중국 중심의 ‘대륙문명권’에 묶였을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이 오늘날의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구한말부터 형성되어 온 문명개화의 꿈을 국가 차원에서 실현한 개화파 지식인 이승만의 공이다.     작가 복거일은 이승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제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우남은 평생 ‘협박’을 하고 산 사람이었다. 그분은 협박의 천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게 옳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내 말을 반박해 봐라. 못하겠으면 선택하라. 나를 꺾기 위해 큰 비용을 치를 것이냐, 나와 협력할 것인가, 나를 밟고 갈 것인가.’그는 미국 사람들에게 잘 통했다. 미국인은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계산이 빠른 문화다. 대표적인 예가 반공포로 석방이다.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우남과 타협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자 미군 장성들이 흔들렸다. 그는 대만의 경우처럼 제주도로 옮기는 척하며 미국을 협박했다. 그는 진정한 애국자였다. 그는 질량이 매우 큰 분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외교와 관련된 일화는 많다. 첫째, 1950년 10월 1일을 기해 국군 단독으로 38선을 돌파해 북진한 것이다.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 이양한 이승만은 유엔군이 북진을 망설이자 작전지휘권을 행사해 버린 것이다. 백선엽 장군은 1989년 펴낸 회고록 〈군과 나〉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이렇게 평가했다. “군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전쟁의 위기를 이승만이 아닌 다른 영도자 아래서 맞이했다고 가정할 경우 그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1953년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이 사망하자 3월 28일 북한과 중국측은 부상포로 교환에 동의하는 동시에 다시 포로 교환문제를 다루자고 제의해 왔다. 부상포로 교환협정 조인을 이틀 앞둔 1953년 4월 9일 이승만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협박성 서한’을 보냈다. 중국군의 한국 잔류를 허용하는 휴전협정을 체결하려 한다면 한국은 압록강까지 북진힐 용의가 있는 나라를 제외한 모든 우방의 철수를 요구하며 미군이 계속 한국에 머무르고 싶으면 공군과 야포, 함포지원만 해주고 후방에 남아도 좋지만, 한국에서 철수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서한은 문맥도 난폭하고 내용도 퍽 과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안심시키고 무마시키려고 곧 답장을 보냈다.”고 썼다. 이런 ‘협박’은 가진 것이 없는 약소국 대통령 이승만이 즐겨 써왔던 수법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즈음 방한했던 닉슨 부통령은 이승만의 외교지략과 지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승만은 휴전의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실리를 얻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미국으로서는 큰 손해인 ‘선물’을 한국에 안기면서도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또 다른 돌발행동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닉슨 부통령을 한국에 파견했다. 이승만을 만난 닉슨은 “한국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전쟁이 재발할 경우 유엔군은 한국을 돕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경제원조가 중단되고 유엔군은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는 아이젠하워의 협박 서한을 전달했다. 이승만은 친서를 훑어보고 눈 한번 깜빡하지 않으며 “잘 쓴 편지군요.”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닉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공산주의자들을 다루는 법’이다. “한국의 단독행동과 관련된 나의 모든 말들은 미국을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미국이 이승만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미국은 미국이 가진 가장 효과적인 협상수단을 잃게 될 것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의 희망을 잃게 될 것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항구적인 견제가 된다.”   한미군사동맹은 이승만의 소신과 집념의 산물이다. 미국은 정전협정에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전쟁이 재발하면 16개 참전국 군대가 돌아온다’고 약속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립서비스를 믿고 정전협정에 동의하는 것은 공산화를 의미한다고 믿었다. 한편으로는 미국 내 프린스턴대 동문들과 조지워싱턴대 동문들을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군 단독의 북진통일을 내세우고 그 의지를 전격적인 반공 포로 석방으로 보여주며 미국을 압박했다. 지도자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책무에 충실해야 하고 그 책무의 이행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의지와 날카로운 혜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한미동냉은 올해로 70주년을 맞는다..지난 70년의 우리 역사는 이승만의 혜안이 옳고 또 옳았음을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다. 한미동맹은 한반도 및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의 핵심축으로서 기능해 왔다     군사동맹은 전쟁억지를 위해 존재한다는 실용주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산 교훈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이웃 나라의 힘에 굴복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더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거나 이웃 나라보다 강한 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고 있어야 한다. 우크라이나가 소련 연방 해체를 맞이하여 독립했을 때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이나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조건으로 핵무기를 러시아에 양도했더라면 오늘날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고 핵무기를 뺀 재래식 군사력 기준으로 세계 6위 군사 강국인 대한민국이니 아무 탈 없을 것 같지만, 중국, 러시아, 일본에 둘러싸여 있고 핵으로 무장한 북한이 있기 때문에 자력으로 안보를 100% 확보하기 어렵다. 한미군사동맹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 요청인 것이다.     지난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탄신 148주년 기념행사에서 박민식 보훈처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는 “공칠과삼(功七過三)이 아니라 공팔과이(功八過二)로도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한 민족이 두 나라로 나뉘어, 북한은 세계 최빈국이 된 것에 반하여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 국가가 된 것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친미, 반공산주의 노선을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이승만 대통령이 자리 잡고 있다.     김지민 기자한미동맹 이승만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혜안 아이젠하워 대통령

2023-04-20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